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돌프 히틀러/평가 (문단 편집) ==== 1941년 [[키예프 전투(1941년)|키예프 전투]] ====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연전연승을 하던 중 8월 3일, 히틀러는 일시적으로 남쪽의 우크라이나 키예프 공격을 위해 모스크바 전진을 중지했다. 중부집단군에 비해 더 강한 소련군의 저항으로 인한 남부집단군의 진격속도 떨어지자 키예프 돌출부가 형성되었는데 그곳에는 백만에 가까운 소련 남서 방면군이 있었다.. 이 돌출부의 이 거대한 병력은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중부집단군에 크게 위험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구데리안은 모스크바 진격이 우선이라며 히틀러를 설득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8월 12일 34 총통 지시령에서 프란츠 할더, 페도르 폰 보크, 하인츠 구데리안 등 모스크바로 바로 진격하자는 주장과 모스크바 진격을 시작하기 전 중부 집단군을 남부 집단군의 키예프 방면으로 진격시켜야 한다는 히틀러의 의견 사이에서 타협을 이루게 되었다. 북부 집단군과 중부 집단군을 각각 지원하기 위해 재배치되었던 중부 집단군의 2 기갑 집단과 3 기갑 집단을 중부 집단군으로 돌린 이후 북부 집단군의 4 기갑 집단과 함께 목표로 돌리고자 했다. 그리고 이 3 기갑 집단은 중부 집단군 지휘 하에 모스크바로 진격했다. 8월 18일, OKH가 히틀러에게 동부에서의 연속적인 작전에 대한 전략적 보고서(Denkschrift)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북부 집단군과 남부 집단군이 중부 집단군의 도움 없이 목표 달성이 가능하기에 모스크바로의 진격이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모스크바로의 결정적인 작전을 시작하기까지 겨울이 오고 있어 충분한 시간이 없다는 것에 대해 지적했다. 8월 20일, 히틀러는 자신의 우선 순위에 대해 독일을 위해서 산업 지역을 먼저 점령해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8월 21일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의 알프레트 요들은 히틀러의 지시 사항을 요약한 보고서를 육군총사령관인 발터 폰 브라우히치에게 전달했다. 이 계획은 겨울이 오기 전까지 크림 반도 및 돈 강의 석탄 산업 지역을 점령하는 것을 강조했다. 8월 23일 구데리안이 직접 동프로이센 총통 본부에서 히틀러를 면담했지만 결국 설득하는데 실패하였다. 즉 수많은 군수뇌부 특히 중부집단군 2기갑단장 구데리안이 계속 해서 설득하려고 노력했지만 히틀러는 자신의 갑작스러운 결정을 끝까지 추진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 구데리안은 기존의 입장을 번복하고 히틀러의 결정을 지지한다. 반면 할더는 이러한 결정을 맹렬히 비난했지만 본인도 딱히 유망한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히틀러의 중부 집단군을 이용하여 남부집단군과 함께 소련군을 포위한 계획은 완벽하게 성공하였다. 그들은 체계적으로 2개의 기갑군이 만든 포위망을 줄이기 시작했다. 키예프 동부의 마지막 군이 9월 26일 항복하였고 독일군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승과 함께 약 60만 명의 포로를 잡았다. 히틀러는 이 전투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투라고 말했다. 만약 여기서 키에프를 무시하고 모스크바를 공격한다고 가정하면 모스크바에 배치된 소련 전력은 실제 역사에서 모스크바 전투 이전에 손실한 병력이 그대로 보존되므로 오히려 더 강력한 상태가 되고 거기에 키에프 방면에 배치된 60만 명의 소련군을 견제하기 위해서 상당히 많은 독일군 전력을 할당해야 할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UN군이 북진하는 과정에서 그리 많지도 않은 빨치산이 후방을 교란하는것이 상당한 골칫거리였다. 제대로 훈련도 안된 게릴라들이 설치는 것도 골치아픈데 60만 명에 달하는 그럭저럭 잘 훈련된 병력을 후방에 남겨두고 진격하는 것이 현명한 결정일지는...] 그러나 키예프 전투에서 소련군을 갈아버리면서 후방을 위협하는 적이 소멸했으니 오히려 키예프 전투가 마음놓고 모스크바를 공격할 수 있게 해준 바탕이 되었던 셈으로 냉전 중이었던 1970년, 서방과의 인터뷰에서 해당 당시 서구 군사학자들의 견해에 대해 주코프가 조소를 날리며 일축했던 일화가 있었을 정도 이 부분에 대한 논쟁이 아직도 계속 되지만 키예프 방면 남부집단군의 그 수많은 소련 병력을 그대로 놔두고 중부집단군이 모스크바로 진격을 하기에는 위험 요소가 너무나도 컸다. 또한 모스크바에는 이미 수많은 전투 준비가 되어있었으며 중부집단군이 키예프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더 빠르게 모스크바에 도달하였다 하더라도 모스크바 함락은 힘들었다라는게 많은 군역사학자들의 의견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